하슬라, 예술로 다시 읽다

조회수: 52
9월 02, 2026

글 고성연

오래된 이름이 다시 불릴 때, 도시는 새롭게 들린다. 강릉의 옛 이름인 ‘하슬라’와 ‘소나무 숲이 울창한 고을’을 뜻하는 ‘솔올’이 그렇다. 한때 역사와 지명에 머물던 이름들이 이제는 국제 예술제와 미술관 이름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을 소개하며 문을 연 솔올미술관은 지난해 시립 미술관으로 재개관해 새로운 역할을 이어가고 있고, 클래식 음악을 중심으로 강릉의 장소와 사람을 연결하는 하슬라국제예술제도 세 번째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 이 새로운 문화 플랫폼들은 강릉에 낯선 무엇인가를 덧씌우기보다, 이 도시가 오래 품고 있던 이름과 장소, 자연과 기억을 다시 불러낸다.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GIAF)의 존재감도 크다. 여기에 새 예술 공간과 창작자들의 움직임이 더해지면서 강릉의 매력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1
2
10월의 축제, 도시의 풍경을 따라 흐르는 음악
강릉에서 예술은 이제 하나의 장르나 특정한 공간에 머무르기보다 도시의 여러 풍경과 만나는 방식으로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올해 세 번째 가을을 맞는 하슬라국제예술제(hasla.or.kr)는 이런 변화를 잘 보여준다. ‘사랑과 우정’을 주제로 한 이번 축제(10월 16~25일)에는 거장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비롯해 바비칸 콰르텟, 이은결, 서의철 가단까지 서로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이 함께한다. 바이올리니스트 후미아키 미우라, 첼리스트 송영훈, 강릉시립교향악단(지휘 정민)의 개막 무대를 시작으로, 2026 하슬라국제예술제 위촉작인 작곡가 김택수의 피아노협주곡 ‘내면의 저편’을 피아니스트이자 예술감독인 조재혁과 함께 세계 초연한다. ‘하슬라의 빛: 이은결 × 조재혁’은 드뷔시 ‘달빛’ 등 클래식 음악 선율에 일루션을 더해 초현실적인 예술적 경험을 선사하는 공연이다. 또 세계 초연작 ‘소리의 몸짓: 가무악일체’에서는 안무가 유회웅, 작곡가 김영상이 함께 국악과 클래식, 무용을 엮어내고, 서의철 가단이 함께해 가무악이 어우러진 색다른 무대를 완성한다. 축제의 대미인 폐막 무대는 백건우와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맡는다. 한불 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뱅상 댕디의 ‘프랑스 산골 선율에 의한 교향곡’, 드뷔시의 ‘바다’ 등을 연주할 예정이다. 백건우는 “자연의 소리야말로 가장 근본적이고 위대한 음악이라고 생각하는데, 자연을 노래한 댕디의 음악을 강릉에서 연주할 수 있게 되어 더없이 기쁘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3
4


하슬라국제예술제는 국악과 무용, 일루션 등으로 장르의 경계를 넓히는 한편 강릉아트센터 밖으로 무대를 확장해 도시 곳곳에서 음악을 만나는 기회를 만들어낸다. 특히 지역 연계 프로그램인 ‘우덜 음악잔치’는 시민의 일상과 맞닿은 공간을 찾아가 음악을 건넨다. 강릉대도호부 관아에서는 판소리와 민속악으로 시민들과 어우러지고(서의철 가단), 초당성당에서는 익숙한 클래식 선율을 나누며(클래시칸 앙상블), 강릉시립미술관 솔올(트리오 하슬라), 아르떼뮤지엄 강릉(바비칸 콰르텟)에서는 미술과 미디어 아트 공간에서 음악을 경험하게 한다. 단순한 공연 장소의 확장이 아니라, 음악을 매개로 도시의 장소와 사람을 새롭게 연결하는 방식이 눈길을 끈다.




5
6
강릉의 예술, GIAF를 토대로 바깥으로 확장하다
이러한 흐름은 시각예술에서도 이어진다. 하슬라국제예술제가 국내외 연주자들과 함께 강릉의 이름을 음악으로 알리고 있다면, 시각예술에서는 파마리서치문화재단이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이하 GIAF)을 통해 동시대 미술의 가능성을 꾸준히 실험해왔다. 2022년 제1회 ‘강/릉/연/구’로 시작한 GIAF는 강릉의 역사와 삶, 장소에 대한 탐구를 이어왔다. 노암터널과 서부시장, 책방과 지역 문화 공간 등 도시 곳곳을 전시장 삼아 국내외 작가들의 작업을 소개했고, 강릉의 장소성과 서사를 동시대 미술을 통해 새롭게 바라보는 시도를 이어왔다. 이제 GIAF에서 소개된 작품들은 강릉이라는 출발점을 넘어 새로운 장소와 맥락을 만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지난 7월 방콕 쿤스트할레에서 개최된 <경계에서 함께 보기>는 그 흐름을 보여주는 사례다. GIAF를 통해 제작·발표된 커미션 작품들을 방콕 쿤스트할레의 공간적 맥락에 맞춰 재구성한 무빙 이미지 기반의 전시 프로그램이다. 강릉단오제와 태국 송크란이 공유하는 공동체적 ‘회복’의 감각을 바탕으로 강릉에서 출발한 작품들을 방콕이라는 새로운 도시의 시간과 장소에서 다시 바라보도록 했다. 전시 큐레이터를 맡은 파마리서치문화재단 박소희 상임이사는 이를 두고 ‘GIAF가 축적해온 강릉의 장소성과 서사를 방콕이라는 또 다른 도시의 시간 안에서 다시 읽어보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방콕 쿤스트할레는 차이나타운의 오래된 인쇄소 건물을 재생해 문을 연 현대미술 공간이다. 2001년 화재로 골조를 제외한 대부분이 소실된 건물의 흔적을 지우기보다 그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전시를 비롯해 강연, 퍼포먼스, 영화 상영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문화 예술 플랫폼으로 다시 태어났다. 예술가들이 기존 공간에 작업을 맞추기보다 건물의 구조와 분위기를 자유롭게 해석하고 개입할 수 있도록 한 점도 특징이다. 이번 협업을 계기로 파마리서치문화재단은 향후 강릉에 조성될 복합 문화 공간 인온(INON, 가칭)을 중심으로 한국과 태국을 잇는 장기적인 문화 예술 교류의 기반을 마련해나갈 계획이다. 전 세계의 예술을 강릉으로 가져오는 데 그치지 않고, 강릉에서 탄생한 예술을 바깥으로 연결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슬라국제예술제가 음악을 통해 강릉의 장소와 사람을 연결하고 있다면, GIAF는 시각예술을 통해 강릉의 장소성과 이야기를 바깥으로 확장하고 있다. 서로 다른 장르지만, 두 예술제는 강릉에 존재하는 장소와 기억을 예술로 다시 읽고, 그것을 도시 안팎의 사람들과 연결한다는 점에서 맥을 같이한다.

7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