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을 품은 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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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 2023

글 고성연

아트 주간에 피어난 공간의 미학

다양한 사람, 문화, 요소가 만나 섞이고 부딪히면서 비롯되는 ‘우연한 충돌’은 도시의 창조적인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데 큰 몫을 한다. 문화 예술 생태계를 들썩거리게 하면서 온갖 키워드와 해시태그를 양산해낸 9월 초 키아프 X 프리즈 아트 페어는 그 반가운 충돌의 장이었다. 양쪽 페어를 통틀어 무려 3백30개 갤러리가 참여한 이 매머드급 행사는 그 자체로도 화제 몰이를 할 만하지만, 도시 산책과 공간의 미학을 탐하는 문화 향유자라면 입을 모아 말한다. 진짜배기는 ‘장외’에 있다고. 올해는 팬데믹의 그늘에서 완연히 벗어난 듯 콘텐츠의 면면이 더 다채로워졌고, 덕분에 도시 곳곳에 매력적인 ‘팝업 공간’이 피어났다. 사실 ‘아트 주간(art week)’이라는 명칭이 무색하지 않게 말이다. 특히 우리네 한옥의 아름다움과 현대미술 전시의 만남이 이뤄내는 오묘한 조화는 발군이었다. 어쩌면 영원하지 않기에 더욱 고혹적인 공간의 잔상이 거의 뜀박질하듯 다닌 탓에 피곤한 발품 팔이를 잠시 잊게 해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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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바젤(Art Basel)과 더불어 세계 미술 시장을 떠받치는 양대 아트 페어로 자리매김한 프리즈(Frieze). 지난해 9월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 상륙하면서 프리즈 서울이 탄생했는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트 페어 키아프(Kiaf)와 코엑스(COEX)에서 나란히 막을 올리고 ‘공동 티켓’을 도입하는 느슨한 협업 구도를 택했다. 그런데 수치 면에서 ‘나 홀로’ 우월한 성적을 올린 것으로 알려진 프리즈 서울에 대해 환호만큼이나 곱지 않은 시선도 있던 게 사실이다. 페어 자체적으로는 개최지 서울에 대한 예의로 여겨질 만한 투자의 흔적이 별로 드러나지 않았으니 더욱 그랬다.
그런데 브랜드든 기관이든 앞다퉈 동참하는 바람에 콘텐츠가 다채롭게 생성되고 공간이 활기를 띠면서 ‘판’이 확연히 달라진 건 엄연한 사실이다. ‘아트 페어 주간’이라는 말은 어색해도, 대중이 누릴 수 있는 ‘문화 예술 주간’이라고 할 만한 분위기는 물씬 풍기게 됐다. 이러한 변화는 글로벌 페어의 ‘브랜드 파워’를 입증하는 사례이기도 하지만, 서울이라는 도시의 공력과 거기에 내재된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유기적 생명체인 도시의 에너지는 결국 그 구성원인 시민과 체류자의 행보에서 빚어지는 게 아니던가. 올해 키아프 Х 프리즈 기간에는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도 개막해 ‘공간’과 ‘장소’에 탐색과 사색이 여기저기 솟아나던 차에, 북촌 한옥마을 일대에 예술을 품고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한 몇몇 한옥의 사례는 도시 축제의 묘미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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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규<동면 한옥>_국제갤러리 한옥

지난해에 이어 올해 키아프 X 프리즈 주간에도 꾸린 구역별 야간 프로그램(한남·삼청·청담 나잇 등) 은 ‘아트 주간’을 도시 축제답게 만든 데 일등 공신이다. 지난 9월 7일 열린 ’삼청 나잇’에서 제일 북적댄 인기 스폿 중 하나는 양혜규 작가의 <동면 한옥>을 선보인 국제갤러리 한옥. 국제갤러리의 주 전시관인 K 1~3관은 세계적인 작가 애니시 커푸어 전시로 인파가 몰렸지만 단독 건물인 한옥 전시장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터라 기다리는 줄이 길게 늘어서 포기하고 돌아가는 이들이 많았을 정도였다. 한동안 서점으로 꾸렸던 이 아담한 한옥 건물은 다시 공사를 거쳐 추후 본격적인 전시장으로 쓰일 예정이라는 소식은 아쉽지만, 그 과도기인 만큼(그래서 전시 제목도 ‘동면’이라는 단어를 붙였다고) 노출된 벽이나 그 벽의 자국 혹은 낙서가 훤히 보이는 상태에서 양혜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의 미학을 선사한 점으로 위로 삼을 만하다. 양혜규 작가는 인천의 한 민가(폐가)에서 국내 첫 개인전 <사동 30번지>를 가졌는데, 당시 빨래 건조기, 깨진 거울, 옷걸이 등 ‘유령 같은’ 삶을 상징하는 장치로 비미술적 재료와 낯선 오브제를 곳곳에 놓아두었다(이런 요소들은 이후 양혜규의 조각을 표상하는 대표적인 오브제로 자리 잡았다). <동면 한옥>은 <사동 30번지>에 비해 훨씬 더 정갈한 환경에서 전개되지만 천장 조명을 마다하고 야간에도 손전등을 의존하게 하는 전시 연출 방식과 ‘시공 중’인 한옥이라는 공간이 그녀의 첫 전시를 떠오르게 한다는 평이 나온다. 가능하다면 낮과 밤의 공간 미학을 모두 경험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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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Curve>_ 리슨 갤러리(이음 더 플레이스)

건축물에 대한 경험은 사실 ‘시각적’이라기보다 ‘운동학적’이라는 의견에 공감하는 편이다. 건축물의 시각적 외관이라는 게 특정한 관점과 거리에서 각각 달리보이는 것이지, 하나로만 수렴된 고정된 상이라는 건 존재하기 힘드니까 말이다. 동시대의 흥미로운 철학자 그레이엄 하먼이 설명하듯 우리는 건축물의 주위와 내부를 걸어 다님으로써 그 건축물을 경험할 따름 아닌가. 우리네 한옥은 이 운동학적 경험의 밀도가 높고 흥미 유발도 역시 높은 경우가 많은 건축이라고 생각한다. 집으로 들어서면 중심에 자리한 마당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그 배경에 있는 거주 공간은 ‘칸’이라는 개방된 구조로 이루어졌는데, 별도의 공간 같으면서도 단단한 벽으로 꽉 막혀 있지 않고 경계가 뚜렷하지 않게 연결되어 고요한 유동성이 흐르는 게 한옥의 특징이다. 건축학자들의 설명처럼 안이 밖이 되고, 밖이면서도 안이 되는 매력적인 가변성이 존재한다. 지난 9월 초 서울 북촌의 이음 더 플레이스에서 열린 리슨 갤러리(Lisson Gallery)의 전시는 이 같은 유동성을 지닌 한옥의 장점을 유감없이 발휘한 팝업 전시였다. 대문을 열고 위로 비스듬히 올라가면 커다란 마당이 펼쳐지고 안채와 별채와 나뉘어 자리한 여러 칸의 방에 현대미술 작품이 저마다의 오라를 방해받지 않고 뿜어내는 풍경. 그리고 절로 느린 걸음으로 유유자적 거닐게 되는 예술 산책은 이 전시의 제목인 <Time Curve>와도 안성맞춤으로 잘 어울렸다. 아이웨이웨이, 세라 커닝햄, 나탈리 뒤버그 & 한스 버그, 라이언 갠더, 시라제 후시아리, 애니시 커푸어, 오토봉 엥캉가, 로르 프루보, 션 스컬리 등 기성 작가와 신진 작가를 함께 소개한 기획전으로 시간, 우리가 시간에 부여하는 가치, 시간의 흐름에 대한 다양한 인식을 주제로 다뤘다. ‘시간’을 주제로 한 현대미술 전시와 한옥 공간! ‘건축은 기억에 근거를 둔 시간적 예술 형식’이라는 표현을 상기해보면,이처럼 잘 맞는 공간이 있을까 싶은 궁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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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s Up / Seoul ‘12 Masters’>_ LVH 아트(양태오 한옥)

올해 키아프리즈 주간에 북촌 한옥 전시 공간에서 은근히 입소문을 모은 또 다른 볼거리는 디자이너 양태오의 한옥에서 열린 기획전 <What’s Up / Seoul ‘12 Masters’>였다. 프라이빗 대관을 주로 하는 이음 더 플레이스와는 다른 매력을 품은 개인의 사적인 주거 공간. 역시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리 크지 않은 크기의 정갈한 마당 풍경부터 시야에 들어오는데, 잠시 서서 우아하게 하늘로 뻗은 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바로 근처에 있는 도심의 번잡함을 금세 잊게 해준다. 아무래도 사택에서 예약제로 운영하는 전시라 대규모 관람객을 맞이하지는 못했지만, 이 전시를 접한 행운을 지닌 이들은 마치 보물찾기 하듯 집 안 곳곳을 다니다가 미술품을 맞닥뜨리며 감상하는 재미에 푹 빠진 모습이었다. 한옥 내부에는 모두 7개의 방(리셉션, 와인 룸, 다도실, 거실, 다이닝 룸, 서재, 지하실)이 있는데, 이 공간을 야무지게 활용해 큐레이터가 선정한 12명의 작가 작품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앤디 워홀, 이우환, 알렉산더 칼더, 장-미셸 바스키아, 존 체임벌린, 키스 해링, 쿠사마 야요이, 조르지오 모란디, 나라 요시모토, 게르하르트 리히터, 스탠리 휘트니, 루카스 아루다 등이다. 작가 명단으로만 보면 ‘미술관급’ 구성이다.



이번 기획전에 포함된 전시품 말고도 서적, 오브제 같은 소품이며 빈티지와 컨템퍼러리의 조합이 흥미로운 가구, 미술품 등 양태오 디자이너의 공간을 눈에 담는 ‘집 구경’이 ‘쏠쏠한’ 덤이었음은 물론이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다른 공간이 펼쳐지는데, 그 공간들이 켜켜이 중첩되면서 만들어낸 아담한 공간 속, 혹은 그 사이에 무심히 얹어놓은 듯한 미술품이나 소품과 마주치는 순간이 의외의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이미 예술의 기운이 흐르는 양태오의 아기자기한 주거 공간을 자신의 전시 작품과 잘 버무려낸 큐레이터 로런스 반 헤이겐(Lawrence Van Hagen)은 LVH 아트를 설립해 전후 미술, 동시대 미술을 전문으로 하는 서비스를 하고 있는데, 6년 전 역시 근처에 있는 학고재에서 전시를 한 뒤 이번에 ‘운 좋게도’ 양태오의 한옥에서 두 번째로 기획전을 열었다고 한다. 나가는 길에 우연히 마주쳤는데, 이렇게 좋은 공간을 두고 떠나자니 아쉽지 않냐고 했더니 웬걸, “기쁘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관람 안내자 입장에서는 갤러리의 화이트 큐브식 공간에 비해 육체적으로 힘든 동선이었다는 생각이 그제야 스쳤다. 하지만 “결과가 좋았다”며 환히 웃어 보이는 얼굴을 보니 중의적 기쁨이었음을 이내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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