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06, 2026
고성연(홍콩 현지 취재)
Brands & Artketing 13_루이 비통 x 프랭크 게리
해마다 3월 말께 열리는 아트 바젤 홍콩(ABHK)이 문화 예술계의 시선을 끄는 이유는, 이 글로벌 아트 페어가 그저 ‘미술 장터’가 아니라 도시 전역을 전시 무대처럼 전환시키는 팔색조 플랫폼이어서다. 끌림의 대상이나 주된 방문 동기는 저마다 달랐겠지만, 올봄 필자에게는 한 건축가 헌정 전시가 의미 있는 비중을 차지했다. 지난해 타계한 프랭크 게리(Frank Gehry)와 20여 년간 이어온 협업을 기리며 루이 비통이 ABHK 2026에서 선보인 회고형 부스였다. 물론 구겐하임 미술관 빌바오,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등으로 대표되는 건축계 거성 프랭크 게리의 작업을 브랜드 협업 서사로 환원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파리의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을 통해 그의 건축 세계와 처음 조우했던 기억이 겹치면서, 이번 전시는 단순한 회고 이상의 존재감으로 다가왔다.
1 지난해 타계한 건축 거장 프랭크 게리. 해체주의 스타일로 잘 알려진 대표적인 ‘스타키텍트’로 구겐하임 미술관 빌바오,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 등 랜드마크로 평가받는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1989년 건축계 노벨상으로 여겨지는 프리츠커상을 받았다. Photo by Kroes Mario
2 루이 비통은 3월 말 열린 글로벌 아트 페어 아트 바젤 홍콩(ABHK) 2026에서프랭크 게리와의 20여 년 협업을 기리며 회고전 형식의 부스를 선보였다. 이미지 제공_루이 비통(Louis Vuitton)
2 루이 비통은 3월 말 열린 글로벌 아트 페어 아트 바젤 홍콩(ABHK) 2026에서프랭크 게리와의 20여 년 협업을 기리며 회고전 형식의 부스를 선보였다. 이미지 제공_루이 비통(Louis Vuitton)
파리의 풍경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에 걸쳐 정교하게 다듬어진 구조처럼, 새로운 것을 맞이할 때 늘 신중하게 숨을 고르는 도시다. 그래서였을까. 2014년 가을,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순간의 공기는 지금도 희미하게 남아 있다. 불로뉴 숲 깊숙한 곳, 나무들 사이로 투명한 돛이 부풀어 오르듯 떠오르던 건물. 빛을 받아 해사하게 흔들리던 그 구조는 건축이라기보다, 어떤 움직임에 가까웠다. 외피는 빛의 각도에 따라 서로 다른 표정을 만들었고, 이동하는 시점에 따라 건물 윤곽은 지속적으로 달라졌다.
그 자리에는 지금은 고인이 된 건축 거장 프랭크 게리(Frank Gehry, 1929~2025)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끈 미술관 개관식에서 의외의 말을 남겼다. 이 프로젝트가 “꽤나 겁나는 일이었다”고. 캐나다계 미국 출신이지만 그는 젊은 시절 파리에 체류한 적이 있기에, 이 도시와 장소가 지닌 무게를 잘 알고 있었다. 온화한 표정으로 덧붙인 그 말은, 단순한 소회라기보다 긴장과 책임감이 배어 있는 뉘앙스로 읽혔다. 늘 자신감과 기백이 넘치던 거장의 고백은 문화 예술을 사랑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자존심 강한 파리지앵으로 하여금 슬며시 미소를 띠게 했다.
파리에서 쌓아간 공간의 추억
필자는 그 후로도 숲속을 유영하는 유리 돛단배 같은 이 미술관을 꽤 많이 찾았다. 유럽과의 물리적 거리를 생각하면 이상할 만큼 자주였다. 두 자릿수가 넘는 횟수였지만, 매번 건물은 조금씩 다르게 보였다. 어느 날은 바람을 타고 떠가는 배 같았고, 어느 날은 숲 위에 내려앉은 구름처럼 느껴졌다. 그 형태는 고정된 게 아니라, 보는 사람과 시간에 따라 계속 변주되는 듯했다. 그때는 그것이 단지 인상적인 건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차 명확해진다. 이 미술관은 당시 80대 중반에 들어선 한 건축가가 평생에 걸쳐 유치해온 창조혼의 집약체라는 것이. 프랭크 게리는 건축을 더 이상 단순한 ‘구조물’로 두지 않았다. 그는 건축을 조각처럼 다루었고, 형태를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 전환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작업이 구겐하임 미술관 빌바오다. 티타늄 외피를 두른 유기적 형태의 미술관은 단순한 건축적 성취를 넘어 도시 자체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빌바오 효과’라는 말까지 만들어냈다. 하나의 건물이 도시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이 현실이 된 대표적인 사례다.
3 루이 비통과 프랭크 게리의 첫 협업 프로젝트로 파리의 랜드마크가 된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 스케치.
4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은 2014년 가을 파리지앵이 ‘애정’하는 불로뉴 숲이 상징적인 파리 16구에 문을 열었다.
※ 3, 4 이미지 제공_루이 비통(Louis Vuitton)
4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은 2014년 가을 파리지앵이 ‘애정’하는 불로뉴 숲이 상징적인 파리 16구에 문을 열었다.
※ 3, 4 이미지 제공_루이 비통(Louis Vuitton)
두고 볼수록 그의 작업에서는 형태에 대한 집요한 탐구가 엿보인다. 선들은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서로를 밀어내고 끌어당기며, 긴장 어린 균형을 유지한 채 유려하게 이어진다. 그 바탕에는 수많은 스케치와 모형, 실험 과정이 있다. 그는 머릿속에서 바로 건물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그리고, 만들고, 다시 해체하며 형태를 발견해나갔다. 그의 스케치가 담긴 책을 펼치면,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자유로운 선들이 어떻게 거대한 건축으로 이어지는지 생생하게 느껴진다.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다 잡히지 않던 곡선과 구조의 긴장이, 페이지마다 숨 쉬듯 드러난다. 겹겹이 얽힌 유리의 곡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밀당’ 하며 버티는 구조. 비로소 이 건물이 ‘어떻게 서 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홍콩에서 마주한 작별, 루이 비통 회고전
그리고 얼마 전, 이제는 꽤나 정이 든 이 미술관의 건축 여정을 다시 접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파리가 아니라, 해마다 춘삼월이면 도시를 온통 영감으로 물들이는 아시아 최대 아트 페어, 아트 바젤 홍콩(ABHK)에서였다. 지난해 말 프랭크 게리가 별세한 뒤 열린 ‘회고전 부스’라는, 많은 이들에게 애잔하게 다가오는 무대에서. 홍콩섬 완차이의 홍콩 컨벤션 센터(HKCEC)에 자리한 루이 비통의 전시 부스는 한눈에 봐도 인상적인 밀도를 지니고 있었다. 관람객을 맞이하는 첫 번째 장면은 부스의 벽을 수놓은 ‘무제(블랙 크로커다일 뉴욕)’(2023) 설치 작업이었다. 유기적 곡선이 대담하게 흐르는 게리 특유의 형태 언어를 보여주며 시선을 강렬히 사로잡은 대형 금속 조형. 전시 전체의 분위기를 진중하게 잡아주는 이 작품은 마치 범상치 않은 게리의 세계에 들어왔음을 알리는 문과 같은 오라를 공간에 드리웠다.
부스는 그의 대표적인 건축 협업과 루이 비통 x 프랭크 게리 핸드백 컬렉션, 향수 보틀과 타임피스, 그리고 다양한 설치물과 협업 작품을 8개 챕터로 나눠 보여줬다. 첫 번째 챕터에서는 루이 비통과의 협업 여정의 시작점인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 모형들이 관람객을 맞이했다. 유리 돛과 ‘빙산’ 갤러리로 대표되는 구조적 볼륨감과 빛의 활용은 작은 마케트(maquette) 속에서도 건축적 유연성과 정교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5 브랜드를 상징하는 모노그램 캔버스의 모티프에 초기부터 관심을 보였던 프랭크 게리는 관련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6 조형적 실루엣이 돋보이는 ‘땅부르(Tambour)’ 워치. 케이스 백에 그의 서명을 새겼다.
7 2024년 루이 비통 창립 160주년을 기념한 컬렉션을 위해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한 ‘트위스티드 박스’ 백.
8 2023년 아트 바젤 마이애미 비치에서 10점의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처음 공개된 루이 비통×프랭크 게리 핸드백 컬렉션도 홍콩에서 선보였다.
※ 5~8 이미지 제공_루이 비통(Louis Vuitton)
6 조형적 실루엣이 돋보이는 ‘땅부르(Tambour)’ 워치. 케이스 백에 그의 서명을 새겼다.
7 2024년 루이 비통 창립 160주년을 기념한 컬렉션을 위해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한 ‘트위스티드 박스’ 백.
8 2023년 아트 바젤 마이애미 비치에서 10점의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처음 공개된 루이 비통×프랭크 게리 핸드백 컬렉션도 홍콩에서 선보였다.
※ 5~8 이미지 제공_루이 비통(Louis Vuitton)
두 번째 챕터는 브랜드 탄생 160주년을 기념한 ‘트위스티드 박스(Twisted Box)’ 백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형태와 소재를 재해석한 이 작품은 단순한 패션 아이템이 아닌 조형적 오브제로, 루이 비통의 ‘여행의 예술’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세 번째는 2019년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낸 루이 비통 메종 서울. 곡선형 유리 파사드와 전통 건축, 그리고 동래학 춤에서 영감받았다는 디자인은 도시 한복판에서 시각적 존재감을 뿜어낸다. 게리가 실제로 방한해 현장을 둘러보고 한국의 전통문화에서 받은 영감을 자신의 건축 철학에 정교하게 녹여낸 메종은 그가 서울에 남긴 선물 같은 공간이다. 네 번째로는 메종 창립 200주년을 기념한 ‘루이를 위한 티 파티’가 소개되었는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영감받은 트렁크와 디스플레이는 환상적이면서도 정교하며, 소재와 조형의 결합을 보여줬다. 같은 해 그가 ‘레 젝스트레(Les Extraits) 향수’를 위해 디자인한 무라노 글라스 블라썸 스토퍼는 특유의 투명성과 볼륨감을 뽐내며 다섯 번째 챕터를 수놓았다. 여섯 번째 챕터는 2023년 아트 바젤 마이애미 비치에서 처음 공개된 10점 리미티드 핸드백 컬렉션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파사드의 콘크리트 질감을 재치 있게 표현한 카퓌신 MM 콘크리트 포켓, 악어 조각에서 영감을 얻은 카퓌신 BB 크록, 그리고 물고기 모티프와 IAC 빌딩의 각진 파사드를 담은 디자인이 이어졌다. 게리의 건축 언어와 루이 비통의 장인 신이 맞물리며, 흥미로운 앙상블의 미학이 응축된 결과물이다. 이어 브랜드의 상징인 모노그램 캔버스의 재해석을 시도한 프로젝트를 선보였고, 마지막 챕터는 정밀한 워치메이킹과 게리 특유의 유려한 조형 감각이 결합된 ‘땅부르 워치’ 섹션으로 완결됐다.
“게리가 평생 다뤄온 두 가지 위대한 주제, 물고기와 요트가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이라는 단일한 창작물에 수렴한다.
그 융합의 결과물은 건축물 그 자체를 대체하는 신화적 생명체다”
_어빙 라빈(미술사학자)
손 위의 건축, 압축된 시간
이 전시에서 마주한 건 물론 ‘건물’이 아니었다. 손바닥 위에 올릴 수 있을 만큼 작아진 마케트, 정교하게 다듬은 모형, 그리고 깔끔하게 정리된 작업의 흔적이었다. 파리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실제로 걸어 들어갔던 공간은 하나의 ‘이야기’로 압축되어 있었다. 단순한 축소가 아니라, 번역에 가까웠다. 도시에서 작동하던 건축적 언어가 오브제의 스케일로 옮겨와 다시 읽히는 재미가 있다. 20여 년에 걸친 루이 비통과의 창조적 협업 역시 같은 맥락 안에 있었다. ‘트위스티드 박스’ 백, 카퓌신 컬렉션, 그리고 사파이어 케이스에 그의 서명을 새긴 땅부르 워치까지. 형태에 대한 그의 집요한 탐구는 더 이상 건물에 머무르지 않고, 손에 들 수 있는 사물로 확장되어 있었다. 한동안 그 작은 모형들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가 여러 프로젝트를 위해 손수 그린 스케치를 차분히 들여다봤다. 다시금 떠올랐다. 파리에서 살짝 너스레를 떨며 말하던 그의 목소리. “꽤나 겁나는 일이었다.” 브랜드와의 창조적 여정을 세심하게 압축해 보여준 홍콩 전시에서는 그 문장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은 정리된 구조로 남아 있었다. 건축가는 사라지지만 작업은 남고, 그 안에서 변주된다. 프랭크 게리의 건축 역시 그렇게 시간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고, 다시 해석된다. 하나의 언어가 다른 시스템 안으로 옮겨지며 새로운 방식으로 작동하는 과정이 협업이 남기는 흔적일지도 모른다. 바람을 타고 춤추는 유리 돛 사이, 동래학 춤사위의 리듬 속에서, 스케치의 자유로운 선들이 빚어낸 공간의 품 안에서 그 잔향은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9, 10 루이 비통 레 젝스트레 향수를 위한 무라노 글라스 블라썸 스토퍼와 향수 보틀 스케치. 이미지 제공_루이 비통(Louis Vuitt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