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리듬 속 여유로이 거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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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04, 2026

고성연(타이베이 현지 취재)

쑹산구 ‘감성 산책길’

싱그러운 잎사귀나 덩굴이 건물을 덮고 있는 중·저층 건물, 자그마한 상점, 저밀도의 거리, 느린 아침, 동네 주민이나 일터로 삼고 있는 ‘내부인’이 아닌 외부 방문객도 유입되는 약간 분주해지는 오후, 번잡스럽지는 않지만 생기가 도는 저녁. 오래된 주거지에서 점차 변화를 겪으며 힙한 라이프스타일의 중심지로 변모해가고 있는 쑹산구의 민생 커뮤니티와 푸진제 일대의 풍경이다. 분명 누군가의 의도가 영향을 끼쳤지만 인위적인 변화가 아닌 자발적이고 점진적인 진화를 일궈온 이 동네에 어떤 일이 생겨난 것일까?


“인간적인 활기가 넘치는 공간, 사람과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장소에서의 삶, 오락과 문화 공간, 자연환경
(수목, 시냇물, 신선한 바람 등)은 일상생활에 있어
제2의 자연이며 없어서는 안 될 환경이다”

_사사키 마사유키 <창조 도시를 디자인하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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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으로 시원하게 뻗은, 그러면서도 폭 넓은 둔화북로에서 도보로 불과 몇 분만 가면 붐비는 도심과는 살짝 동떨어진, 쑹산구의 조용한 주거 지역이 나온다. 1960~70년대 미군이 계획적으로 건설한 주거 지역으로, 공원과 녹지가 풍부하고 낮은 건물과 골목, 그리고 작은 상점이 평화롭게 자리한 민생 커뮤니티다. 근처에 오래된 쑹산 공항이 바라다보일 뿐 대형 랜드마크도, 휘황찬란한 쇼핑몰도 (아직은) 없다. 대신 학교와 공원, 왠지 정감 가는 작은 빵집과 채소가게, 그리고 반려견과 여유로운 산책을 즐기는 주민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겹치는, 기분 좋은 느슨함이 깃든 일상 풍경이 차분하게 펼쳐진다. 키 큰 나무들이 공중에 기다랗게 팔을 드리워 천연 아케이드처럼 둥근 곡선을 완만하게 그리는 짙푸른 아치들은 ‘동네의 세월’을 말해주는 듯한데, 여기 사람들은 ‘그린 터널’ 또는 ‘그린캐노피’라고 부른다. 시끄럽지는 않지만 어쩌면 그래서 조금은 건조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둔화북로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갑자기 시공간이 바뀐 듯 느긋하고 세련된 정취가 흐른다. 나무 그늘이 드리운 거리를 비롯해 이 동네에서는 20개의 비교적 작은 공원, 언뜻 봐도 맛집의 기운이 느껴지는 레스토랑, 창의적인 부티크가 눈에 띈다. 디자이너와 예술가, 광고 스튜디오가 조용하게 터를 잡고 있기도 하다. 도심의 한 자락에 있으면서도 삶의 질을 중시하는 ‘느림의 미학’이 바로 여기에서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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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영감을 담뿍 주는 상점들의 매력
오후 3시경 나선 산책. 시야의 끝에 자리한 쑹산 공항의 모습을 스쳐 멋스러운 나무 그늘길을 거니노라니 어느새 약간 출출해졌다. 사실 첫 목적지의 정체성을 모른 채 어떤 건물의 입구에 다다랐는데, 벽에 옷을 형상화한 인포그래픽과 더불어 ‘Clue’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언뜻 양복점처럼 보이는데, 동행인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가보니 근사한 패턴과 질감을 지닌 원단과 재봉 도구 등이 진열된 공간이었다. “오, 예쁜데. 남성복만 재단하는 곳인가?”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다가 ‘Manners make the man’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벽을 발견하고는 살짝 실망했다. <킹스맨>으로 더 유명해진 이 문구를 보아하니 영국 스타일의 맞춤형 양복점인가 보다 했는데, 웬걸. 반전이 있었다. 안으로 더 들어가면 개성이 돋보이는 오브제와 그림 등이 전시된 또 다른 결의 공간이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고소하고 풍부한 향기가 은은하게 감도는 카페가 등장한다. 알고 보니, 현지에서 SNS용 사진 명소로도 잘 알려진 인기 만점 쿠키 & 디저트 가게였다. ‘but. we love butter’라는 브랜드를 내세운 이 가게에서는 주로 테이크아웃으로 주문해서 포장 꾸러미를 들고 나가지만, 차와 더불어 쿠키를 시식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생치즈가 들어 있는 달콤짭조름한 ‘허그 미(Hug Me)’가 ‘최애’였다. 패션으로 눈을 돌리면, 식도락과 달리, 일주일에 서너 번만 여는 가게가 꽤 있어서 그런지, 한눈에 쿨한 품목의 집합소임이 명백해 보이는 편집숍들이 닫혀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다채로운 개성이 넘치는 온갖 원단과 귀여운 부속품으로 ‘하나밖에 없는’ 크고 작은 가방을 만드는 상점에서 앙증맞은 에코 백을 발견해 아쉬움을 달랬다. 거의 1세기의 이력을 지닌 타이프라이터 같은 구식 기계라든가 수십 년 된 빈티지 카메라, 일본 에도시대의 목판화인 우키요에 에디션까지 만물상처럼 갖춘 디자인 숍에서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아마도 작은 판화라도 골랐을 것이다. 어느새 노을이 지면서 어스름하게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 대만의 인기 과자인 에그롤을 직접 만들어 파는 가게에서도 맛보기를 하고는 바깥에 나오니, 어둠이 깔린 저녁에 대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사당에 걸린 붉은빛 초롱들이 반짝거린다. 마지막으로 대만의 또 다른 대표 디저트인 파인애플 케이크(펑리수)를 섭렵하러 나섰다. 펑리수 브랜드로 유명한 서니힐즈의 본점이 이 동네에 자리하는데, 여기서도 차와 곁들인 펑리수 시식을 무료로 할수 있다. 이 정도는 대만에선 흔한(?) ‘넉넉한 인심’의 작은 증표라는 게 현지인들의 설명이다(물론 ‘잘되는 가게’의 관대한 대접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디저트 여정’만으로도 은근히 배가 불러왔지만, 이미 약속해놓은 저녁 식사가 걱정되기보다 이 동네의 레스토랑에서 미식을 탐할 수 없기에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는 점이 더 아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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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다는 것, 그리고 속도를 늦춘다는 것
사실 여행 작가 시린(喜琳)의 책에는 여러 카페와 상점이 소개되어 있었지만 벌써 출간된 지 10년도 더 흐른 터라 현재의 푸진제/민생 커뮤니티 일대에는 훨씬 더 다양한 이름을 거리에서 마주칠 수 있었다. 그래도 800m 길이로 펼쳐진 가로수길인 푸진제의 터줏대감이자 특유의 ‘생활 감성’이 녹아든 상권의 주된 시작점인 푸진수(Fujin Tree) 브랜드는 더 커진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창립자는 일본에서 체류하다 부인과 함께 고국에 돌아온 대만의 사업가 제이 우(Jay Wu). 그는 유럽의 소도시 같은 평온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지닌 민생 커뮤니티와 수려한 나무가 가득해 거리 전체가 녹음이 우거진 산책로 같은 푸진제를 발견하고는 단번에 반했다. 이들 부부는 먼저 편집숍인 푸진제 355를 열었다(2012년). 부인 미도리는 자신이 좋아하던 브랜드를 일본에서 직접 공수하고 타이완 현지 디자인 명물을 수집했는데, 반응이 꽤 좋았다. 지금은 이 거리에 카페, 레스토랑 등 다양한 공간을 거느린 건 물론이고, 해외로도 확장 중인 ‘푸진수’라는 브랜드의 탄생이다. 급격한 확장은 아니었지만 느리게 걷는 도심 속 힙한 산책로의 독특한 감성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이 일대가 창의적이고 세련된 상권으로 주목받았다. 그럼에도 흔한 스토리 전개처럼 젠트리피케이션의 파도에 휩쓸려 망가지지 않고 여전히 특유의 바이브를 유지하고 있다. 덜 과시적이고 회전율보다 로컬 팬을 중시하며, 체인점이 거의 없는 편이다. 현지에서 ‘아는 사람은 아는 매력적인 동네’지만 원래 조용한 주거 지역이라 느긋한 생활감이 자연스럽게 남아 있다. 다시 말해 ‘힙한데, 조용한’ 묘한 균형이 존재한다. 외부인도 찾지만, 주 소비층이 여전히 이 동네에서 거주하거나 일하고 있는 ‘찐’ 단골인 덕분이다. 따라서 여기에 들어오는 업자들도 콘셉트의 ‘힙함’에 편승해 ‘빨리 팔기’보다는 ‘꾸준히, 오래 꾸려갈’ 생각을 하는 태도가 일반적이라는 누군가의 해석도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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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카펠라 타이베이의 총지배인 데니스 라우벤슈타인(Dennis Laubenstein) 역시 이 동네의 주민이다. 그에게 이 동네는 ‘근무지 인근’이 아니라, 매일의 삶이 이어지는 생활 반경이다. 그래서 카펠라 타이베이에서는 이 동네를 ‘보여주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걸어보는 ‘로컬 문화 산책의 장’으로 삼기로 했다. 카펠라에서 직접 밖으로 나가 거닐면서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체득하자는 취지로 진행하는 3시간짜리 ‘카펠라 큐레이츠(Capella Curates)’ 프로그램의 목록에 쑹산구 산책도 포함돼 있는데, 라우벤슈타인이 이따금 컬처리스트(culturist)를 맡아 몸소 산책을 이끈다. 연초 성수기라 바쁘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이번 주에만 벌써 세 차례”라고 답하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제가 실제로 사는 동네가 아니었다면 산책 가이드를 하지 않았을거예요. 여기는 제가 산책을 하고, 쇼핑을 하고, 저녁에는 식사를 하는 제 동네니까요.” 그는 지역 주민들과의 자연스러운 소통과 일상 경험을 호텔 서비스에 녹여내며, 투숙객들에게 단순한 관광 이상의 밀도 높은 경험을 선사한다. 예컨대 카펠라 타이베이는 이 동네를 무대로 활동하는 화가 아리엘 치(Ariel Chi)와 협업해 일러스트 작업을 진행하기도 하고, 호텔 갤러리에서 그의 전시를 직접 꾸리기도 한다.
동네 홍보대사를 방불케 하는 데니스 라우벤슈타인의 행보를 보노라면 원조 홍보대사인 제이우가 했던 말이 와닿는다. “브랜드의 발전은 사람에서 출발합니다. 저는 모든 직원이 일과 생활의 균형을 맞춰 즐겁게 살아가길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만 있으면 푸진수는 무한히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럭셔리 매거진 <태틀러>와의 인터뷰 내용을 빌리자면, 도심과 가까우면서도 다른 타이베이 지역과 차별화된 독특한 이 동네의 분위기를 “거리를 통째로 사버리고 싶다”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로 유별나게 아끼는 제이 우는 매일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누빈다고한다. 그는 한때 사업 진행 속도를 높이는 바람에 위기도 겪었지만 일본에 파인 다이닝을 선보이며 해외 시장에 진출했고, 이제는 뉴욕과 런던 등 서구권 도시로도 영역을 확대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그 바탕에 깔려 있는 주된 동기는 ‘세계를 대만으로 들여오고, 대만을 세계로 알리려는 것’이다. 대만 사람들의 ‘생활 미학’이 (긍정적으로) 변화했다는 자신감이 뒷받침된 결단이다. 푸진수의 확장이 과연 다른 도시에서도 성공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살짝 걱정되기도 하지만, ‘미감(美感)도 하나의 문화’라는 그의 신념 어린 도전에 응원을 보내고 싶다.






Taipei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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